“장애인도 자신의 몸과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WHO 9월 캠페인이 한국에 던지는 ‘건강권’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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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회 작성일 26-08-24 13:58 SNS 공유 :본문
“장애인도 자신의 몸과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WHO 9월 캠페인이 한국에 던지는 ‘건강권’ 과제

세계보건기구(WHO)가 2026년 9월 한 달간 ‘세계 성·생식 건강의 달(World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Month)’ 캠페인을 전개한다.
올해 캠페인의 핵심 메시지는 간결하다.
“Health starts here.”
건강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다.
WHO는 성·생식 건강을 단순히 임신과 출산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다. 관계와 동의, 피임, 난임 치료, 임신과 출산,
성매개감염병 예방,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자신의 신체와 미래에 관한 의사결정까지 포괄하는 생애주기적 건강권으로 규정한다.
이 메시지를 한국 사회의 장애인 정책에 적용하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에 도달한다.
장애인은 이러한 건강과 정보, 의료서비스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이용하고 있는가.
장애인 건강권은 ‘치료받을 권리’보다 넓다
장애인의 건강권을 이야기하면 흔히 재활치료나 장애 관련 의료서비스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건강권의 개념은 훨씬 넓다.
예방접종을 받을 권리, 건강검진을 받을 권리, 질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이해할 권리, 필요한 의료기관을 이용할 권리,
임신과 출산에 관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 그리고 의료행위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할 권리까지 포함한다.
UN 장애인권리협약(CRPD) 제25조도 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협약은 장애인이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비장애인에게 제공되는 것과 동일한 범위·질·수준의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성·생식 건강 분야의 서비스에도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더 중요한 원칙도 있다.
의료행위는 당사자의 자유롭고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자나 시설, 의료인이 본인을 대신해 모든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건강권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권리’인 동시에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할 권리’다.
WHO “세계 장애인의 약 16%가 상당한 장애 경험”
WHO는 전 세계 약 13억 명, 전체 인구의 약 16%가 상당한 수준의 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문제는 장애 자체만이 아니다.
WHO는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더 이른 사망과 열악한 건강 상태, 일상생활 기능의 제한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격차
상당 부분이 의료체계와 사회환경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하고 예방 가능한 장벽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병원의 계단 하나, 높이를 조절할 수 없는 진료대 하나,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 상담실 하나가 의료 접근을 막을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자료 역시 장벽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전문용어만으로 의료정보를 설명하거나 시각장애인에게 이미지 형태의 검사 안내문만 제공한다면 형식적으로 정보는 제공됐지만
실제적인 정보 접근권은 보장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 건강격차를 줄이는 것은 장애인의 신체 상태를 변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의료환경과 제도를 변화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생식 건강에서 장애인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WHO와 유엔인구기금(UNFPA)은 이미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한 성·생식 건강 욕구를 갖지만 관련 정보와 서비스 이용에서 다양한 장벽을 경험한다고 지적해 왔다.
특히 장애인은 성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나 임신·출산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성교육과 피임, 임신 준비, 난임 관리, 산전·산후관리,
성매개감염병 예방 등의 정책에서 배제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연애하고 결혼하며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피임과 난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도 있으며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피해 발생 시 의료·상담서비스를 이용할 권리 역시 동일하다.
따라서 장애인의 성·생식 건강을 이야기하는 것은 특수한 요구를 별도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권리를 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보장하라는 요구다.
여성장애인의 임신·출산은 ‘가능 여부’가 아니라 ‘접근 가능성’의 문제다
여성장애인의 임신과 출산 문제에서는 의료 접근성이 더욱 중요하다.
산부인과 진료대에 올라가기 어려운 휠체어 이용자가 있을 수 있다.
청각장애인은 산전검사와 출산 과정에서 수어 또는 문자통역을 필요로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검사 결과와 의약품 복용방법을 음성이나 접근 가능한 전자문서 형태로 제공받아야 할 수 있다.
발달장애인은 쉬운 문장과 그림 등을 활용한 충분한 설명과 의사결정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지원이 ‘배려’로 취급될 때 발생한다.
배려는 기관의 사정에 따라 제공되기도 하고 제공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의료 접근성이 건강권의 구성요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접근 가능한 진료환경과 정보, 의사소통 지원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료체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 된다.
한국도 장애인 건강 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도 장애인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은 확대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건강보건 전달체계는 중앙장애인보건의료센터,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 보건소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는 건강검진과 재활, 의료기관 연계뿐 아니라 여성장애인의 임신·출산 지원과 의료종사자 교육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와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 장애친화 산부인과 역시 전달체계 안에서 연계되고 있다.
이는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당사자가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지역별 의료기관 분포, 교통수단, 진료예약 방식, 의사소통 지원, 의료진의 장애 이해도 등 실제 이용과정에서 발생하는 장벽까지 살펴야 한다.
2026~2030년 첫 장애인 건강 종합계획, 이제는 ‘실행력’이 핵심이다
한국 정부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적용되는 ‘제1차 장애인 건강보건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보건복지부가 밝힌 정책 방향은 ▲장벽 없는 의료이용 ▲재활을 통한 퇴원과 지역사회 복귀 ▲2차 장애 예방 및 건강증진 ▲장애인 건강정책 기반 마련 등이다.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 확충, 장애인 건강주치의 활성화, 생애주기별 건강관리와 여성장애인 건강관리, 의료수어 표준화 등도 포함돼 있다.
한국에서 처음 마련된 장애인 건강보건 분야 종합계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설 숫자만 늘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 이용률과 건강 결과가 개선되고 있는지를 측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이 몇 곳 지정됐는가보다 장애인이 검진 예약부터 검사, 결과 설명, 사후관리까지
실제로 차별 없이 이용했는가를 평가하는 지표가 필요하다.
정책의 기준이 공급자 중심에서 이용자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AI 시대, 건강정보 접근권도 장애인 건강권이다
WHO의 2026년 9월 캠페인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메시지는 ‘정확한 정보’다.
WHO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정보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건강을 보호하며 권리를 행사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장애인에게는 이 원칙이 더욱 중요하다.
건강정보가 홈페이지에 게시됐다고 해서 접근권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스크린리더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청각장애인이 영상정보를 이용하려면 자막이나 수어가 제공돼야 한다.
발달장애인과 고령 장애인에게는 쉬운 글과 이해하기 쉬운 그림자료가 필요하다.
디지털 기기 활용이 어려운 사람을 위한 전화상담이나 대면창구도 유지돼야 한다.
생성형 AI가 건강정보 제공에 활용되는 시대에는 접근성뿐 아니라 정보의 정확성과 책임성도 중요해진다.
AI가 제시한 건강정보는 의료진의 진단을 대체할 수 없으며 국가기관과 전문 의료기관의 검증된 자료를 함께 확인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디지털화’가 곧 ‘접근성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의료 현장 중심에 놓아야 한다
장애인 건강권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자기결정권이다.
UN 장애인권리협약은 의료행위에서 자유롭고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동의를 강조한다.
이는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의사결정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고 쉬운 언어로 설명하며 필요한 경우 의사소통 보조수단이나 신뢰할 수 있는 지원자를 활용해 당사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피임과 임신, 출산, 난임치료 등 성·생식 건강 분야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
장애인의 몸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가족과 의료진의 편의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Nothing About Us Without Us’가 의료정책에도 적용돼야 한다
WHO는 최근 장애인의 건강 형평성을 의료정책의 핵심 과제로 확대하고 있다.
WHO는 2025년 ‘Disability Health Equity Initiative’를 공식 출범시켰으며 장애인의 건강 형평성을 정치적 우선순위로 높이고
장애포용적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며 관련 지표와 근거를 강화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제시했다.
특히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단체의 정책 참여가 강조된다.
이는 장애계에서 오랫동안 강조해 온 원칙인 ‘Nothing About Us Without Us’, 즉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을 결정하지 말라’는 정신과 연결된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의료정책을 의료기관과 행정기관만 모여 설계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병원을 이용하는 장애인이 무엇을 불편하게 느끼는지,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어떤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지를 정책 설계 단계부터 들어야 한다.
WHO 9월 캠페인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다섯 가지 질문.
2026년 9월 ‘세계 성·생식 건강의 달’을 맞아 한국 사회가 확인해야 할 것은 캠페인 참여 여부가 아니다.
장애인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가다.
첫째,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일한 수준의 건강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가.
둘째, 장애유형과 관계없이 건강검진과 산부인과, 재활과 일반진료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가.
셋째, 의료진은 장애인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충분한 설명과 동의 절차를 거치고 있는가.
넷째, 장애여성과 발달장애인 등을 성·생식 건강정책의 주체로 인정하고 있는가.
다섯째, 장애인 건강정책을 평가할 때 기관 숫자가 아니라 장애인의 실제 건강 결과와 이용 경험을 측정하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장애인 건강권이 선언에서 현실로 이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건강은 ‘병원 문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
장애인의 건강권은 장애인만을 위한 별도의 특혜가 아니다.
누구든 장애를 갖게 되거나 노화와 질병으로 이동·감각·인지기능의 제약을 경험할 수 있다.
장애인이 편리한 의료환경은 고령자와 임산부, 일시적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에게도 편리하다.
쉬운 건강정보와 접근 가능한 디지털 서비스 역시 사회 전체의 의료 안전성을 높인다.
따라서 장애인 건강권 보장은 보건복지의 주변 정책이 아니라 보편적 의료체계의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WHO가 2026년 9월 캠페인에서 제시한 “Health starts here”라는 문장을 장애인 건강권의 언어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건강은 병원을 찾아갈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정보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의료진과 의사소통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몸과 건강, 임신과 출산, 미래에 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장애인의 건강권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이고 의료권이며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2026년 9월 WHO 캠페인은 한국 사회에 그 당연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원칙을 다시 묻고 있다.
출처 : 웰페어뉴스

